교회모임 겟어웨이에서 느꼈던 바들이 제법 많아서, 그걸 좀 차례대로 시간을 두고 풀어보려고 한다.
그 두 번째 소제목, '나와 당신의 인생 이야기' 이다.
#1.
성장과정을 함께 했거나, 혹은 정말 높은 밀도와 농도로 가깝게 지낸 관계가 아닌 이상, 우리는 상대에 대해서 자세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고, 그렇게 다가가 상대의 여러 면을 보려고 하기엔 너무 에너지가 많이 든다. 시대가 그렇게 변했고, 또 누군가를 새로이 많이 깊이 알아가기엔, 세상엔 이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나도 많다.
내가 과연 잘 '안다' 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삶에 몇 명이나 있나,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에겐 그런 사람이 셋 정도 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아마 다섯 명을 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겟어웨이는 제법 좋은 기회였던 게, 내가 나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 약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나눔' 에 대한 나의 사전적 정의도 조금씩 바꿔볼만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2.
나는 말을 잘 한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글을 잘 쓴다. 이 두 가지를 무기삼아 10대를 시작했고, 그 이래 지금까지 맨손으로 헤쳐나오다시피 했다. 무슨 얘기냐고? 그걸로 돈을 벌었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말이다. 학교 간판도, 학위도, 비즈니스도, 명성도.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사람도, 사랑도.
나는 수능을 잘 보기도 했지만 글쓰기로 SKY에 입성했고, 글쓰기와 말하기로 대학 내내 생활비를 벌었으며, 상계, 월곡, 하계 근처에서 나름 입소문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다. 공부 죽어도 하기 싫다는 애를 처음 만난 날 말빨로 동기부여 시켜서, 절망적이었던 애를 성균관대에 보낸 이후로, 내 이름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원도 이 말빨로 아주 요상한 방법으로 들어갔다. 훗날 나의 은사께선 '국내 최고 학교의 대학원 면접장에 와서, 뭘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놈이 있나?' 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 웃기지만 나는 '모르는 것' 과 '아는 것' 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기지를 통해서 면접을 패스했다. 이는 딱히 준비된 게 아니라, 즉석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나의 대처 방법 중 하나다.
#3.
내가 무언가를 '잘 한다' 고 말하기까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기준이 높다는 건 내가 무언가를 평가할때도 똑같다는 얘기다. 해서 나는 카메라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다 'photographer' 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타 칠 줄 안다고 해서 다 '뮤지션' 이라고 부르지 않고, 글 조금 쓴다고 해서 작가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무언가를 통해 자신에게 entitlement를 먹이기 위해선, 거기에 필요한 철학이 존재한다. 그 철학의 유무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물론 내 기준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화를 내는 것은 별 쓸데 없는 에너지 소모라는 것이다.
#4.
글의 주제가 분산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바로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면이 존재하고, 깊이, 넓이, 색깔 모두 다 다르다. 이런 것들을 잘 정제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야기꾼의 자질이다.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생이 있지만, 그 인생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에 따라, 그리고 듣는 이들에 따라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다. 그 사람의 인생에 들어있는 아이템들은 아무리 평범하게 지낸 사람이라 하더라도, 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다 보면 나의 이야기들이 조금씩 정리되어 계속 내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고, 태어나고, 또 깨지고, 재구성되어 자리잡는다.
#5.
하나님께선 우리가 서로 나누길 원하신다. 다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디까지 얼마나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해 늘 경계심이 있다. 좋은 사람이 때론 좋은 사람이 아닐 때도 있고 (사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니), 내가 가진 것을 어디까지 까야 안전한지, 얼마나 가리고 살아야 하는지, 또 한편에서는 이러한 '숨김' 의 행위가 답답할 수도 있고.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한 세상살이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은, 있는 그대로 다 까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룹 세팅이 아닌, 1:1 인간관계 세팅에서,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것이 때론 나의 치부이자 악한 면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의 그런 점조차 사랑하는 사람이다. 결함 없는 인간이 없기에, 애당초 완벽한 인간을 표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불완전한 존재로서, 나의 '완성' 을 추구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자, 내가 이 세상에 온 사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벽과 완성은 다르다. 완벽은 불가능하나, 완성은 가능하다. 완벽은 이기적이나, 완성은 어우러짐이다.
완성은 결국 서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6.
인간은 본래 악하고, 이 세상의 속성도 악이다.
그러한 악 속에서 우리가 선함을 노력하는 것이 바로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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