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생일 즈음에 기록해뒀던 글이다. 벌써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이 블로그에 옮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써보는 생일이 한참 지난 자의 '마치 어제와도 같은' 리콜렉션이다.
만일 당신에게 가장 특별한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뭐 여러 의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딱 하루만을 꼽자면 생일이 되는 사람이 제법 많을 거라고 본다.
단순히 축하받고 어쩌고를 넘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 날이니, 결혼도 출산도 이별도 만남도 모든 것이 다 이 '생일' 이라는 기반 이후에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헌데, 미국에 넘어오고 나니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 다소 무감각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있었을 때에는 동호회 활동부터 석사 친구들, 대학 친구들, 그리고 종종 고등학교 친구들까지 생일이다 하면 일단 만나거나 했었는데, 미국에 넘어오면서 완전히 리셋된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움에서, 생일을 굳이 챙겨야 한다? 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아마도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 바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
어쨌든 그러다가 류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생각보다 생일이 재밌어졌었다. 비단 류 뿐 아니라 조금씩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친구들 혹은 지인들과 요상한 celebration 을 했었고, 음악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는 또 다른 Birthday Jam 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류는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내가 가르치는 것에 가깝긴 했지만, 감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서로가 없는 것을 채울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열심히 스쿼시를 치다 말고 뜬금없이 'I have a special invitation for ya dear' 라며 꺼내들었던 히사이시 조 티켓이었다. 류는 내게 지브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얘는 자신이 내 세상에 들어와 있었던 것을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내 세계를 잘 관찰하고 이해한 모양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은 흘러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고. 그리고 나서는 이번이 세 번째 생일이다.
2.
항상 생일을 떠들썩하게 보내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내는 생일의 새로운 패턴은 나름 신선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뭘 기념한답시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뭔가를 한 게, 굉장히 오랜만이다. 이것은 내가 아끼는 동생 '용' 의 제안이었다.
용과 친해진 게 어느덧 한 2년이 넘었다. 대학원 테니스 클럽에서 알게 되었는데, 당시 음료수를 걸고 로테이션 게임 내기를 했다. 저스틴과 용이 각각 헤드로 팀원을 뽑아가는 식이었는데, 용이 갑자기 '쟤보단 이 형이 훨씬 안정적이니까' 라며 나를 데려갔다. 그 때의 나는 테니스를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처음 쳤는데, 다시 제대로 시작한지 약 2개월밖에 안 되었던 터라,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용이도 내가 궁금했다고 한다 (과연 그게 진실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ㅋㅋ). 그 날 테니스 끝나고 저스틴과 용이 둘 다 라이드를 해줬는데, 차 안에서 급격하게 친해졌고, 나중에 용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결이 잘 맞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된다. 덕분에 그 이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의 여러 부분을 공유하면서 지내게 된다. 이 친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따로 얘길 해 보려고 한다. 배경면에서 나와 많은 부분이 다른 친구지만, 분명 나보다 어림에도 배울 점이 많은 친구이니. 요즘 용은 나에게 기타를 배우고 있다.

3.
다시 생일 이야기로 돌아와서.
뭐 크게 엄청난 감정이나 감성의 대서사를 겪은 건 아니다. 다만 내 판단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천천히 한 조각씩 맞추며 증명해가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쩌다 보니) 임시 회장이 되어버린 테니스 클럽에서 요즘 주 2회씩 생각보다 인텐스한 테니스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막 엄청나게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같이 하이킹도 가고, 저녁도 먹고 하는 식의 관계들이 새로 생기고. 내가 많이 아꼈던 동생이자 대학원 후배(?) 인 신 선생은 뒤늦게 테니스 바람이 불어 목숨을 걸고 테니스를 치고 있다. 떠나는 신선생이 못내 아쉬운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원래 누구에게 쉽게 저녁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사교육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서 어떻게든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를 갔다만, 정작 빈부격차라는게 거기서 진짜로 벌어지는 걸 목도하곤 살아남으려고 과외에 20대를 갈아넣은 감이 있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 가서 보니 무슨 건설사 사장 아들에, 증권사 대표 아들에, 유명 어학원 오너의 딸에 뭐 이런 식이었다. 물론 나 역시 교수의 아들이지만, 생각보다 현실에는 여러 문제들이 혼재하는 법이다.
가장 쇼크가 되었던 게,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인 박선생 (음악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그 양반이다) 이 그냥 부모님한테 돈좀 달라고 해서 여행가자고 했던 때인데, 우리 집은 그 당시에는 내 대학 생활비조차도 서포트가 어려웠던 시기라서 이건 아예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정상이고 그들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나니, 내가 그냥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용이 되어서 하늘에 올라와보니 이미 하늘에는 성을 가진 용들이 수두룩했더라는 뭐 그런 웃긴 이야기다. 아, 여기서 얘기하는 개천용은 실제로 내가 용이다 뭐다가 아니라, 그냥 그 때에는 지방에서 사교육 안 받고 스카이 간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렀던 관례 비슷한 거니 오해 말길.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많이 반복된다. 석사때도 그랬고, 박사를 와서도 그랬다. 나는 늘 과외를 대여섯개씩 뛰면서 돈을 벌었지만, 그 돈들은 쉽게 빠져나갔다. 내가 쉽게 쓴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야 내 30대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걸 20대에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절의 경험 덕에, 지금의 나는 이 세상 어디에 떨궈놔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인간이 되었다.
4.
사람답게 사는 법이라. 석사 때의 일이다.
석사시절 월급은 25만원 남짓이었고, 기숙사비 9만원을 내고 나면 사실상 식비도 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학때 열심히 벌어뒀던 과외비들은 생활비 및 기타 등등으로 다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럼 이제 남는 방법은- 일단 랩생활이 9 to 10이었기때문에 과외는 어려웠으니, 장학금을 생활비로 쓰는 것이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면,
석사 1년차 여름이었다. 더워서 죽을 것 같은데 정문술까지 걸어가는 길에 정말 탈진해 쓰러질 지경인 것이다. 연구를 막 시작한 새내기는 머릿속이 엉망이었고, 쓸데없이 스트릭트한 랩 문화 덕분에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다. 그러던 차에 폭염을 만나니 정말 기절할 듯 싶은 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절실했다. 바로 눈앞에 던킨이 있는데, 당시 3천원 남짓이었던 아아 한 잔을 마시면 점심을 못 먹는 상황이니 그럴 수 없었다.
근데 갑자기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5.
행복은 본래 '오래 참음' 에서 온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오래 참아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건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트랙에 들어섰는데 그 출발선이 한참 뒤에서 출발해야하는 입장에선 좀 다르다. 남들은 하는데 내가 하지 못하는 '경험' 의 부재를 계속해서 채워 나가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쭉 가난하던 시절에도 꾸준히 나에게 투자를 해 왔다. 대학생 때는 편의점의 1800원짜리 도시락으로 내내 끼니를 때우면서도 기어이 여행을 다녔고, 기타를 샀고, 카메라를 샀다. 그 기타는 내 삶을 바꿔 주었고, 카메라 역시 수많은 소중한 일들을 내게 가져다 준다.
그런데 기껏 대학원에 왔더니 세상이 좁아지고 있고, 내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좁아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카이스트 교정에서의 그 순간,
나는 생각을 바꿨다.
6.
정말 쪄 죽을만한 날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오리연못 앞에 아아를 들고 앉아서 분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천국이었다.
그 날, 다짐했다. 장학금을 생활비로 쓰고, 학자금 대출을 해서 학비를 내자.
그리고 이 것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마지막 남은 400만원 남짓의 돈으로 중고차를 사고,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월 80정도 되는 소비를 할 수 있다는 건 월급 25만원의 인생보다 월등히 나은 선택이었으니. 지금도 나는 당시의 내가 그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잘 했다 과거의 나. 그 덕분에 내 세상이 더 좁아지지 않고, 오히려 넓은 세상을 봤고, 새벽까지 일하면서도 중간중간 춤추러 다니고, 기타 치러 다니고, 또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가히 '아름다웠다' 고 말할 수 있는 석사 생활을 했다. 너무나도 즐거웠던 기억이다.
7.
뭐, 경제적 어려움은 어찌 보면 삶에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리라. 내 박사 1~3년차는 그 때문에 또 다른 괴로움이었지만, 그 괴로움 덕분에 나는 새로운 눈을 하나 더 뜨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 덕분에 아예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다.
비즈니스를 할 줄 알게 된다는 건 단순히 내가 학문을 하고 박사를 딴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가 미국에 건너오고 나서 딱 박사학위만 획득한 게 아니라, '돈' 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익히고, 또 지도교수 덕에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더 뚜렷하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어지간해서는 나를 위해 모여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너무 비싸면 좀....)
과거에는 정말 밥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젠 적어도 그럴 여유는 생겼으니.
나를 찾아 이 도시에 들르는 내 예전 고객들도, 내 멘티들도 다 그렇다. 그들이 나를 위해, 나를 리스펙하고 나를 따르기 때문에 와 주는 그 마음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베푸는 삶이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나를 보는 시선에서는 전보다 확연한 성장을 이뤄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아내려고 경쟁하고, 또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경쟁하며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고, 경쟁하면서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 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마냥 견디고 인내하며 피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그리고 많은 것을 이루고 남기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이 상황에 매몰되지 않도록,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단추는 사람이요, 두 번째는 돈이다.
이 두 가지가 삶을 살아가는 데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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