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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 Arte Sefla

나의 음악이야기 #1. 왜 음악을 사랑하는가

by BLUESSY 2023. 11. 1.

@Thruline Coffee, Kirkland, WA / Photo by KH Kim, IPhone 11 Pro Max

#0.

언제나처럼의 일요일 저녁, 한주간 밀린 글들이랑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Kirkland 의 Thruline Coffee에 왔다. 이 시간이면 안쪽 테이블에서 라이브 음악이 들린다. 공연은 아니고 사람들이 종종 모여서 잼을 하는 세션인데, 예전에 몇 번 같이 합주했던 할아버지들은 요즘 안 보이고, 새로운 크루가 나타났다. 또 다른 백인 할아버지 3인방-- 기타, 첼로, 바이올린, 밴죠, 하모니카 등 레퍼토리가 엄청나게 다양하고- 곡들이 좀더 내 구미에 맞는 느낌이다.

열심히 듣다가, 너무 좋은 곡이 나와서 결국 못 참고 물어보고 만다. 그리고 내친 김에 나도 기타를 치는데 (아마추어지만) 다음부터 껴도 되겠냐 물어보고. 내일부터 종종 같이 연주를 하기로 했다. 너무너무너무 행복하다. 역시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찬 놀이터이다.

아, 내가 못 참았던 곡은 벤 모리슨의 Brown Eyed Girl이다. 집에 들어가면 연주해봐야겠다.

 

리드기타는 Al (앨), 밴죠랑 바이올린은 Andy, 하모니카는 Jim (Kirkland에서 유명한 Steve Lamson이라는 피아니스트의 duet이라고 한다), 첼로는 Robert. 보컬 누님은 Kelly- 그리스 이민자라고 한다.

 

 

#1.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의 일이다.

'바둑이 방울' 이라는 동요가 있다. 이 곡을 입학식의 끝부분에 틀어줬었는데, 이상하게 그 곡이 계이름으로 들리는 경험을 했다. 집에 와서 피아노로 쳐 보았고, 정확히 그 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님은 기절초풍하셨다. 아버지는 클래식기타, 어머니는 바이올린/성악으로 두분 다 음악을 하셨던 분들이었지만 두분 다 절대음감은 커녕 상대음감도 없는 분들이셨어서, 당신들의 자식이 이 요상한 재능을, 그것도 입학식 동요를 듣다 깨우쳤다는 걸 아시고는 경악 절반, 그리고 놀라움 절반의 반응으로 한참을 그저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바라보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2.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두분 다 클래식을 끼고 사셨고, 무리해서 그 당시 고가였던 스피커와 앰프, 그리고 턴테이블을 사서 태중의 나에게 클래식을 들려주셨다. 내가 신생아였던 시절부터 나는 꾸준히 클래식에 노출되어 있었고, 피아노를 다섯살? 때부터인가 배우기 시작했으니. 요즘 생각해보면 내 아주 어린 시절은 음악에 둘러쌓여 있었다 하겠다. 

지금도 아버지의 LP 컬렉션은 어마어마하긴 하다. 클래식만 들을 것 같던 아버지의 라이브러리에는 온갖 팝, 락, 재즈가 있기 때문. 심지어 마이클잭슨의 스릴러 앨범 초판이 있다. 정확히는 있었다. 작년에 한국 방문해서 찾아보니 그것만 어디로 사라졌더라. 한편으로는 아버지도 젊은 날 불태웠던 낭만과 음악에의 열정이 있었으리라. 그것이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에 집중하시다 보니 마음 한켠으로 미뤄두신 게 아닐까 하는, 다소 아릿한 감정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3.

어렸을 적 부터 지브리를 접했다. 내 또래가 흔히 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내 기억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2000년 개봉..아마도) 필두로 다른 지브리들이 한국에 수입된게 한참 후인지라, 나는 92년도부터 이것들을 접했으니 그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아직 뇌가 열려있고, 눈이 더럽혀지지 않았던 어린아이에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는 환상 그 자체였다. 내 속을 뒤집어 섞어서 새로운 인생을 보여주는 전환점. 그것을 나는 5살에 시작하여, 평생에 걸쳐 이 느낌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아직도 한국의 부모님 집에는 이 두 비디오테잎이 보관되어 있다.

어릴적부터 애늙은이였던 나는, 한참 애송이인 주제에 어른인 척을 그렇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어른들 눈에는 귀여워 보였겠지만, 나는 나름 진지했다. 얼른 5살이, 얼른 10살이 되고 싶었고, 5살이 되면, 그리고 10살이 되면 어른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차오르던 감정들을 왜인지 모르지만 어릴적부터 누르고 조금이라도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는 게 있었다고 기억한다. 지브리는 이런 나의 구속 같은 감정을 많이 부수어 주었다. 그 중에 가장 임팩트가 컸던 건, 영상미보다도 음악이었다.

가장 처음 접했던 지브리가 아마도 토토로였을 텐데, 그 이후 차례대로 마녀배달부 키키, 나우시카를 봤다. 이 세 개의 비디오를 미친듯이 돌려서 보다가, 이후에 '스튜디오 지브리' 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되고,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이 때가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인터넷이 막 태동하던 시기, 나는 학교 컴퓨터실에 날마다 숨어들어 저녁시간까지 야후 재팬을 뒤지곤 했다. 그 덕에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귀를 기울이면, 붉은 돼지 등의 더 많은 지브리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4.

처음으로 라퓨타의 '너를 태우고' 를 들었던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건 내가 명확히 기억하는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미디버전의 너를 태우고는 '도대체 세상 어떤 인간이 이런 곡을 만들 수 있는가' 라는 느낌을 주었던 최초의 곡이었다. 클래식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미디파일을 다운받아서 1.44인치 플로피 디스켓에 넣어 보물처럼 간직했다. 내가 <천공의 성 라퓨타> 라는 full title을 알게 되고, 그 VCD를 손에 넣기까지는, 이 날로부터 장장 4년이 걸렸다.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져 VCD를 복사해서 판매하는 곳을 찾아내느라- 우리집은 가끔 전화비 폭탄을 맞고, 나도 뒤지게 맞았다. 그 덕에 ADSL을 설치했으니 결과론적으론 내 승리다 (?). 그 VCD를 당시 집에서 새로 샀던 DVD 플레이어에 넣고 돌리면서, 오케스트라 버전의 '너를 태우고' 가 울려퍼질때의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선율과 영상미는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하다. 세상에 화면과 나만 남겨진 느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5.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를 것이다.

나는 다소 혹독하게 공부를 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음악과 지브리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감성도 없고 메마른 공부기계로 자라나, 건조하고 재미없는, 그저 성취주의에 매몰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300%다. 물론 유전자가 그렇게 놔두진 않았겠지만, 지금 내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도달하는데 못해도 5년, 길게는 10년은 더 걸렸으리라.

 

누군가,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라 하였는가.

나는 사는 것이 즐겁다.

세상에는 재밌는 일, 즐거운 일이 너무 많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힘듦이겠지만, 나에게는 수많은 호기심과 즐거움, 신기함이 가득한 하나의 커다란 실험실이자 놀이터이다. 언제부터 이런 시각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음악과 춤을 더 적극적으로 즐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피아노보다는 기타를 즐기면서부터 삶의 관점이 바뀌었다.

서울 거리 어디든 기타를 메고 다니다가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서 칠 수 있었다. 명동, 삼청동, 대학로, 학교 중앙광장, 종로 등 가리지 않고 어디든 쏘다니면서 기타를 치곤 했다. 본의 아니게 지나가는 행인양반들께서 오백원 천원씩 내 기타케이스 위에 얹어두고 가시곤 했다. 덕분에 이 공연비(?)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언젠가 종로 3가...였나. 그 사주보는 곳 모여있는 지역이 있는데 정확히 어딘진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긴 거리의 입구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백발의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잠깐이었지만 음색도 너무 좋고 기타가 화려하지는 않아도 적재적소에 좋은 멜로디가 끼어드는 걸 보아하니 하루이틀 하신 게 아닌 듯 하여, 그 다음주 내내 날마다 기타를 들고 거길 찾아갔다. 결국 다시 그 분을 만났고, 우리는 짧은 듀엣을 몇 곡 했다.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이문세의 옛사랑, 그리고 두어 곡 정도 더. 나중에 보니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따라가는 수준까지 가서 인사드리고 철수했던 기억이 있다.

 

 

#6.

그 당시의 할아버지와 듀엣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되게 묘했다. 일단 연주하면서 합이 맞고 즉흥 주고받기가 되는 사람을 인생에서 처음 만나봤다. 그래서 때론 빠르게, 때론 길게 늘어뜨린 템포로 같은 곡을 가지고 노는 게 참 재밌었는데,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져 참을 수가 없어 소리내어 웃었다. 할아버지도 웃으시고, 기타를 치며 정말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게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공연을 서고 별 짓을 다 해도 내게 오지 않던 감정이, 종로 길바닥에 앉아 노신사와 기타를 치던 나에게 드디어 찾아왔다. 예고 없이, 그러나 명확하고 강렬하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뭔가 뜨겁고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찌르는 듯, 목을 넘어 나오려는 타는 마음. 그것이 내 얼굴을 타고 눈으로 올라가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그게 내가 음악을 하는 원동력이자 가장 근원적인 이유라는 걸, 한참 지난 후에 깨달았다. 기타부 형 동생들과 중앙광장에서, 동아리실에서, 잔디밭에서 코로나 한 병씩 들고 앉아 땅콩 까먹으면서 기타를 치고, 합주하고 즉흥 하다보면 나는 그렇게 울컥하는 게 많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울고있는 나를 발견하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형님이 그런 얘길 했었다.

 

"(아주 많이 순화된 버전) 너는 감성이 충만한 놈이로군."

 

오해는 마시길. 나에게 따로 둘이서 놀 때 했던 얘기다. 그는 그렇게 남들 앞에서 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발언을 할 만한 자가 아닌, 충분히 다정하고, 거친 언사 속에 따스함이 몸에 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뒤이어 "근데 그런 사람이 요즘 잘 없지." 라며, 나를 위로했다.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다시 기타를 치던 그는, 지금도 내 마음 속 가장 가까운 아군이자, 내가 정말 아끼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하나이다.

 

 

#7.

내가 어린 시절 공부에 파묻혀 살 때에도, 결국 내 구원은 기도와 음악이었다. 할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작은 집으로 옮겼음에도 피아노는 늘 거기 있었고, 튠이 살짝 틀어졌음에도 나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 레슨은 초등학생 때 받은 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두 가지 이유로 레슨받을 생각을 못 했다. 첫 번째는 절대음감 덕에 생긴 자만심이었고, 두 번째는 금전적인 문제. 그리고 그 위에, 명문대를 가야한다는 집념 때문이었다 하겠다. 그럼에도 피아노를 놓지 못했던 것은 내 마음 어딘가 억눌려 자라왔던 부분에 대한 유일한 치유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꼭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절대음감이 있었기에 내가 피아노를 꾸준히 칠 수 있었던 듯 싶다. 당시에는 화성학이고 뭐고 몰라서 그냥 들리는 대로 되는 대로 쳤는데, 그렇게라도 계속 쳤기에 지금까지 내가 음악을 하고 있지 싶다. 물론 이 절대음감은 결과론적으로는 내겐 약간의 저주 비슷한 걸로 작용하는데, 그건 다음 편에서 써보도록 하고.

 

그 덕에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학교 기숙사에 피아노 연습실이 3개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거기서 거의 살았던 것 같다. 때마침 좋은 친구 박선생을 알게 되어, 그와 함께 피아노를 치러 가곤 했다.

박선생은 나에 비하면 한참 정통파 트레이닝을 거친 친구였다. 절대음감이나 즉흥에 대한 능력은 본인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 대신 악보를 정말 성실하고 완연하게 잘 따라간다. 이것이 후에 알게된 기본기의 중요함인데, 나는 이 친구와는 정반대로 완전한 사파였던지라 남들보다 어느 수준- 이를테면 70% 정도 - 에 도달하는데는 월등히 빨랐지만, 70에서 100을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기본기가 없었다. 그는 나와 절친한 벗이면서도 나와 완전히 다른 타입의 사람이었는데, 20대를 함께 보내고 30대에도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내 인생 스승 중 한 명이라 하겠다. 언젠가 이 양반에 대해서도 한 번 즈음은 이야기를 해 보리라.

 

 

#8.

음악을 할 때면, 나는 세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나 혼자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치는 것도 좋다. 그리고 개러지밴드 같은 걸 통해 혼자서 음악을 만들 때에도 나는 내 세상이 넓어지고, 뒤틀리고, 찢어지고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즉석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음악을 통한 대화이다.

 

즉흥연주는 하나의 언어이다. 상대가 본인의 연주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 싶은지를 알아듣고, 그에 대답하는 것. 내가 질문을 던지는 것, 다같이 같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노래하는 것. 이것들은 의사소통이 가능케 하는, 그리고 같은 틀 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같게 또 다르게 하는 언어의 예술이다.

그것이 아주 정교하게 맞아떨어지거나, 혹은 러프하게 맞물리는 때도 있고. 아예 다른 불협화음이 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지나가고 지나가 다음 음을 맞이하고, 다음 구절을 달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빛으로 가득차는 감각이, 기타를 치는 내 손에 닿는다. 상대의 눈을 보면, 상대의 손을 보면, 그리고 상대의 제스쳐를 보고 악기를 보면 그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음악을 통해 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음악은 내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자칫 경직될 수 있었던 내게 수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예술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건, 끊임없이 기타를 치고 피아노를 치면서 나 스스로에게 내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 느낌, 내 해석대로 음악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재능은 분명한 축복이다. 아니, 축복이었다. 이건 다음편에서 다뤄봐야겠다.

 

내 세상을 재구성하고, 몇 번이고 부수는 경험.

단조로운 나의 세상에 색깔을 가져다주는 음악.

 

그런 음악을 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