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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 Arte Sefla

나의 음악이야기 #2. 재능의 저주

by BLUESSY 2023. 11. 14.

 

비오는 날 저녁의 Kirkland. Photo by KH Kim, IPhone 11 Pro Max

 

#1.

언제나처럼 퇴근하고 Thruline Coffee에 들러 엘을 만났다. 오늘은 엘과 앤디가 있었고, 끝날때 즈음 로버트가 합류했었다. 로버트가 오기 전에 엘과 듀엣을 하고 있었는데, Brown Eyed Girl을 해보자고 했다가 혼났다 (말 그대로 진짜 혼났다. 제대로 안 한다고)

 

"Harold, I can see your gift- not sure what it is, but I know you have something by nature or talent. You know what? I can see you didn't work on the basic technical practice from that. Am I right? That might be the reason why you did not reach to the higher level compared to your talent and experience"

 

날카롭구만 할배, 정확했다. 몇주 전 엘에게 내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에는 분명 본인이 초보자라서 우리는 G C D E F 키만 주로 한다고 했는데, 스트로크든 뭐든 보아하니 절대로 초보자가 아니어서 그냥 입닥치고 예예 하고 있었는데.

어제 앤디에게 들은 바로는, 이양반은 어지간한 메이저 밴드들에서 리드기타로 40년을 쳤다고 했다. 어쩐지. 속았다 ㅋㅋ 아니 속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어이없는 양반같으니라고.

 

 

#2.

아무튼 나를 꿰뚫어본 그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Exactly. I have a gifted perfect pitch from when I was 6. I didn't have to do the basic training since then, because I was able to play most of the songs pretty well without teaching. Even in my highschool days, I was able to play piano a way better than my music teacher, cuz I self-learned how to do the improvisation, and arrangement."

 

 

#3.

한국 나이로 8살, 미국 나이로 6살에 갑자기 찾아온 절대음감은 내 음악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긴 했지만, 일종의 저주 같은 걸 남겼다. 소홀했던 기본기와, 악보읽는 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이다. 화성학도 기본적인 부분은 아예 공부하지 않아도 화성학을 어느 정도 공부했던 사람보다 직감적으로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즉흥연주가 가능해지는 게 이 때부터 1년이 걸리지 않았으니, 완성되지 않은 기본기로 맞이했던 재능은 저주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내 테크닉은 8살의 나로부터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정통 뮤지션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정말 사파 중의 사파고, 기본기가 박살이 나 있다. 3년 전 쯤에 데이빗 (David S Lee, 시애틀의 기타리스트였던 자) 이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기타리스트는 어쨌거나 블루스를 쳐야 한다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그는 사파처럼 보이는 엄청난 정통파 기타리스트였는데, 말이 유독 없는 그가 나와 잼을 할 때마다 던져주던 말들을 다 들었더라면 나는 지금 아예 다른 레벨의 뮤지션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걸 가장 후회했던 게, 내가 나의 지도교수님과 기타를 종종 치게 되고 나서였다. 이양반은 나만큼의 재능은 없지만 블루스에 미친 기타리스트라, 내가 블루스를 알았더라면 정말 재밌는 걸 함께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울 따름.

 

 

#4.

엘은 Brown Eyed Girl의 도입부의 리프를 내게 친히 하나하나 짚어가며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Don't do the single' 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얼핏 단순한 한 마디지만 이 안에 엄청난 게 담겨 있었다.

 

즉, 농땡이 그만 피우고 똑바로 하라는 것.

 

생각해보면 그렇다. 피아노도 기타도 바이올린도 기본 주법만 익히면 나는 어지간한 곡을 바로바로 연주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기에 즉흥연주가 가능해지고 나니 사실 별로 연습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

유일하게 피나게 연습했던 기억은 2015년인가 16년인가, 몸담고 있던 스윙댄스 커뮤니티에서 음악 좀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개스통'이라는 재즈밴드를 런칭했었다. 밴드 세컨기타 할 때 우리 대장이 나름 필살기로 준비했던 아이유의 '을의 연애' 멜로딕 기타 파트였다. 그때만큼은 진짜 빡세게 연습하긴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취미가 만나는 만큼, 오랜만에 강의까지 들으면서 기타에 열중했던 때인데, 그 때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열심이었다.

다만 그 때조차도 템포를 좀 느리게 해놓고 쳤었고, 지금은 아예 그 멜로딕파트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5.

내 삶에서 제대로 된 뮤직파트너는 둘 있었다. 

음악이야기 #1에서 언급했던 대학 동기이자 내 삶을 통틀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인 박선생과, 여인의 향기 편에서 언급된 내 박사과정 동기이자 진심으로 아끼는 벗인 류 (Liu) 양이다. 둘 다 classically trained pianist이고, 테크닉 면에서는 내가 아예 따라갈 수 없을만큼 성실하게 훈련한 친구들이다.

박선생과 류는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잘 자랐고. 기본에 충실한 삶을 꾸준히 잘 살아온 친구들이다. 음악에 나타나는 특성 또한 그러했다. 정석을 온전히 꾸준히 따라간 편이라 둘 다 어느정도의 초견이 가능할 정도의 악보 리딩 실력이 있고, 클래식 트레이닝에서의 성실함 또한 그러했다. 

 

존 슈미트의 All of Me (존 레전드 말고, 엘라 핏츠제럴드 말고) 이라는 곡이 있다. 박선생이 내게 알려준 곡인데, 내가 그를 기억하는 (죽은 사람 얘기하는거 아님. 잘 살아있어서 맨날 카톡방에서 떠들고있음)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0년이 흐르고, 평소처럼 밤새도록 류의 피아노와 함께 기타를 치다가 갑자기 그녀가 멈췄다.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Hey, are you familiar with the name Jon Schmidt?' 라는 것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fAZIQ-vpdw

The Piano Guys - All of Me (Jon Schmidt)

 

그 날의 내 기분이 어땠을지, 과연 당신은 상상이 가는가.

 

아예 다른 시간과 삶을 살아가던 두 개의 세상이 만나는 기분, 이거 무슨 느낌인지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류는 갑자기 당황해서 내게 괜찮냐 물었다. 와인을 그만 마시라고 잔을 빼앗으려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너 뭐 칠거냐. 워터폴? 올옵미? 랬더니 이번엔 류가 당황했다.

 

"I never thought you know Jon. I know your style right?"

 

일단 아무거나 쳐보라고 했다. 당연히 All of Me가 흘러나온다.

8년만에 치는거라며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딱 그날 하룻밤만큼은 정말 세상에 나와 류만 남은 기분으로 그녀의 연주를 들었다. 류의 손과 건반 빼고는 세상이 다 하얗게 지워진 느낌.

 

류에게 처음으로, 박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친구에 대하여, 내가 박선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들과 감정들을 나눠주었다.

 

언젠가 둘이 만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아니, 반드시 만나서 셋이서 음악을 하고야 말겠다.

 

 

 

#6.

즐기기만 하고 농땡이 피다가, 기타를 친 지 어느덧 햇수로 16년차?가 되었다. 

기타를 치기 시작하고 한 3년 정도는 정말 편했다. 심지어 내 예전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 마을회관 어르신들 모아놓고 옛날 곡들 공연해달라는 요청도 종종 받았었고- 참고로 이게 내 과외보다 시급이 두 배 이상 쎘다. 보통 4~5곡 치고 5만원에서 10만원 근처를 받았었는데, 아쉬운건 한달에 서너건 정도밖에 일이 없었다는 것. 근데 기타가 늘질 않으니 지금 17년째 제자리다. 레퍼토리야 한 200배 정도로 늘었지만 그건 뭐 연습을 해서 늘린게 아니라 그냥 듣고 조금씩 편곡한거니 시간의 문제였을 뿐이다.

즉, 17년전의 나보다야 아주 조금 낫긴 하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유의미한 성장을 하진 못했다.

 

지금 이래저래 희한한 움직임들이 내 주변에 일어나기 시작하긴 했다. 내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이예은씨가 고엽 (Autumn Leaves) 소규모 그룹레슨을 열었는데, 이게 또 나름 어떤 의미냐면 내가 박사과정동안 다짐했던 게 바로 예은씨가 편곡해서 녹음한 고엽을 정말 악보 그대로 완주해보겠다는 것이었다. 1/3 정도 지점까지 갔다가 그만두기는 했는데, 그랬던 내 과거가 채찍질되듯이 레슨을 연다 하니 들어보려고 등록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 할아범과 아저씨들을 만났다.

우리가 잼을 하는 자리와 악기들. 바이올린, 하모니카, 밴죠, 만돌린, 기타, 첼로.... 매번 계속 뭐가 추가된다.

 

 

#7.

시애틀에서의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고 류를 떠나보내면서 이제 내 시간도 곧이라는걸 사무치게 깨달았다. 그러니 이 도시가 다르게 보이고, 내 시간과 내 주변 인연들이 새로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도시의 흘러가는 시간들, 그 후반부에야 찾아온 기적같은 행복.

 

스탠바이미 합주를 듣고 도저히 참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무엇에 홀린 듯 들이받았던 비오던 날의 용기는, 나에게 몇백배로 보답해주었다.

 

내 인생 3번째의 음악파트너는 한 두 명이 아닌 그룹이다. 락밴드나 메탈밴드 같은 걸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마저도 완벽하게 빅밴드라니. 거기에 모두가 나에게 음악을 가르쳐준다. 최근에는 Don에게서 파워코드와 락 진행, 그리고 엘에게서는 리프를 풍부하게 하는 주법을, 앤디에게서는 멜로디 배리에이션을 색다른 관점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로버트에게서는 말을 신사답고 세련됐지만 그러나 ㅈ같이 하는 방법을 경청하고 있는데, 정말 '제대로 배운' 정통파 백인 영어의 날카로움을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관찰하는 중이다. 부드러운 미소의 첼로맨의 내면에 가득찬 전투력은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너무 재밌다.

 

 

#8.

나의 재능이자, 나의 저주에 감사한다.

기본기를 박이나 류 처럼 갈고 닦진 못했더라도, 테크닉을 떠나서 음악 자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영혼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풍부해지는 내 삶의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높다. 내가 세상을 여전히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음악 덕분이다.

2019년에 시애틀에 찾아와 나를 만나고 간 내 기타부 후배가 그랬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기타가 있으면 괜찮지 않냐고. 동감한다. 내 삶에 그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기타가 늘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 재능은 시간이 흘러도 나와 함께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음악 이야기이다.

 

내 사랑하는 벗인 박선생과 류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