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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머리를 비우는 것 - The power of doing nothing

by BLUESSY 2023. 12. 29.

<2023년 11월 9일의 일기로부터 발췌>

 

밴드 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든 생각인데,

 

세상 평온해보이는 오리 선생, Photo by KH Kim, Canon 60D + Sigma 18-200mm DC OS HSM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비워지냐......

 

머리에 너무 많은것들이 들어차게 되면 결국 오버히트가 걸려서 파업을 해버리기 때문에 간간히 안에 들어있는것들을 다 내다 버려주는 작업을 해야된다. 물론 이 비우기 작업이 한번에 쉽게 되는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두시간 정도 명상을 하면 좀 깨끗해지곤 했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말이다.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몇 명의 지인을 잃었고, 지인의 죽음을 경험했다. 한 몸처럼 지내던 친구를 다른 나라로 보내며 (얘는 죽은거 아님) 이상한 이별을 겪었다. 이런 일들이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어서, 감정적인 셋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미완성의 상태에 덧붙여,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1.

사업은 작년보다 매출이 좀 늘었는데, 말인즉슨 할 일이 진짜 많아졌다. 직원에게 보너스를 줘가며 일을 시키고 있다. 약간은 미안할 지경이지만 어쨌든 일은 일이니까. 어쨌거나 사업을 하면 내가 그간 모르던 시장경제를 알게 되는 일들이 거의 날마다 일어나고 있어서, 이 배움은 반드시 정리를 해서 내재화를 시켜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시간 이상은 이 '정리' 에 사용되는데, 그 정리가 완성되면 머릿속 백그라운드에서 지속적으로 그걸 학습하게 된다.

베이스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하나 정도 늘 있는 셈이다. 끄면 좋겠는데, 아마도 끄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돌아가게 둔다.

 

 

#2.

한동안 미뤄뒀던 출판도 다시 불을 당겼기 때문에, 아직도 앞이 안 보이지만 글쓰기를 전의 2~3배는 더 하고 있다. 교회 모임 끝나고 친구들과 차 한잔 하면서 나눴던 이야기인데, 책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둘 다 결국 모든 사업이 향하는 목표 선상에 일치하는 일인지라 즐거울 따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식의 분배와 감정 해소인데, 한 가지의 목표를 강렬하게 가진 사람으로서 모든것이 같은 방향으로 align 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 글쓰기가 온갖 곳에 다 위치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뇌가 그 쪽으로 커스터마이징이 끝난 것인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 까지 온갖 글감 투성이인 삶에서 그걸 놓치기 싫어서 매번 메모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차에도 오피스에도 집에도 노트가 빼곡하고, 재킷 주머니에 들어갈 사이즈의 수첩을 꼭 하나 들고 다닌다. 글쓰기가 삶의 엄청나게 큰 부분인 건 맞는데, 이렇게까지 삶을 해칠 정도로 들어오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이다.

 

어릴 적 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다. 그간 써왔던 글들을 절대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큰 그림에서 몇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기 때문에, 그 해에 언젠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다.

 

 

#3.

26년 즈음에 런칭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면서 동업할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다. 내가 그간 하고 있던 사업에서 창출된 잠재적 동업자들을 슬슬 만나기 시작했는데, 아마 그 중 몇은 이미 이 글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머리가 안 비워진다. 백그라운드 프로세스가 한 열 개는 돌아간다는 느낌이다.

 

 

#4.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해봐도 머릿속에 계속 무언가가 떠오르고. 그 떠오르는 생각을 캐치해야되니 그럼 결국 메모 -> 메모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짧은 글 작성의 반복이다. 이것은 사실 비단 사업이나 창작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본업에도 해당되는 일인지라,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 

 

이 상황에서 새롭게 찾은 해답이 하나 있긴 있다.

 

바로 몸을 혹사할 만큼 움직이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류가 있던 때에는 거의 매일을 스쿼시코트에서 살다시피 해서 확실히 잡념 컨트롤이 잘 되었던 듯 하다만, 류가 시애틀을 떠난 지금, 나는 테니스에 매진하고 있다. 절반은 사람 만나는 재미, 또 절반은 테니스가 가지는 게임적인 오락성이다. 어떻게 해야 강한 볼을 치는가, 전략적으로 치는가만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그것말고 아무 생각도 안 들게 된다. 그 느낌이 참 좋다. 아예 새로운 자아를 찾는 느낌이라고 해야될까. 김성모 화백의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가, 가끔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로 바뀌어 돌아오는 경우가 바로 이럴 때인 것 같다.

 

 

#5.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것을 나는 무위지력 (無爲力)이라고 부른다. The power of doing nothing. 무위는 도가사상의 그 무위가 아닌,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지개 씨가 언젠가 오피스에 놀러와서 Dolce Farniente 라는 문구를 포스트잇에 써서 준 적이 있다. 이것은 The joy of doing nothing인데, 이 또한 중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신력에 데미지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진짜 창의력과 혁신은 때론 멈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온다. 그제서야 비로소 뇌가 그간 받았던 정보를 추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밸런스를 잘 찾는 것이 결국 삶을 얼마나 잘 살아내는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