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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셋잇단음표 (triplet) 의 줄다리기 - 나의 색을 찾아가려면

by BLUESSY 2023. 12. 25.

 

 

My New Guitar, Photo by KH Kim, iPhone 11 Pro Max

 

"Just a feeling, don't be too obsessed with the rhythmic details when you play the triplet"

 

 

#1.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최근 온라인 줌 레슨을 시작했다. 본인이 직접 어레인지한 Autumn Leaves (고엽) 를 파트별로 나눠서 진행하는데, 내 고질병인 "악보대로 완주" 가 아직 안 되어가지고 이번 레슨은 Auditor로 참가했다.

 

 

#2.

아주 오래간 나를 헷갈리게 했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셋잇단음표를 어떻게 연주하느냐인데, 정의상으로는 2박자를 셋으로 균등하게 나누어 연주한다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정확히 박을 재서 나누어 연주하는 경우는 없고, 사람이 메트로놈이 아닌 이상 주관적인 해석이 개입하게 되는 부분이자 그것을 허용하는 포맷이 이 셋잇단음표의 연주법이다. 때마침 그녀의 고엽에도 셋잇단음표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 어제의 레슨은 Bossa Nova style arranged part 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질문할 거리가 풍부했다. 그녀에게 던진 내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

 

"Can you give any advice on how to play the triplet when we adopt the bossa nova style, and anything else?"

 

 

#3.

내 음악인생에서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갈린다. 이것은 내가 음악을 대하고 수련하는 태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는 음악을 너무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대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음악에 '진지한' 사람들은 나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음악은 해소이자 즐거움이지, 과학처럼 어떤 연구 대상이나 진리 추구의 영역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온전히 취미로 하는 사람치고는 음악성 덕에 이미 오래전부터 취미레벨은 한참 뛰어넘었다. '들으면 어지간한 곡은 바로 칠 수 있다' 는 것은 대학시절에는 사람들로부터 시기질투를 사기에 충분했다.

 

다만 여기서 그들이 착각하는것은, 내가 이것을 즐거움과 취미로 대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덜 열정적이라는 게 아닌데, 본인들의 태도만이 정도라고 주장하며 나를 깎아내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자들은 나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나를 시기하는 자들은 끝끝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으로 남는다.

 

아, 이건 비단 음악뿐이 아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멸시하거나 시기하거나 하는 자들이 있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은 본인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여러 방어기제에 대해 나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다. 무의식의 바닥까지 내려가보면 결국 그 베이스는 컴플렉스에 도달한다.

 

 

 

#3-1.

이 질문을 꺼내든 이유는, 아주 오래 전 내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코멘트 때문이다.

아마 그 누군가 또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낸 코멘트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도 음악을 이론만으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히 이해했을텐데도, 이론만을 들이대며 나를 찍어누르려 했던 걸 보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를 싫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당시의 나는 Por Una Cabeza를 4중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연습하던 중이었고, 2주제 (메인테마) 의 도입부에 있는 셋잇단음표에서 발생한 논쟁이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셋잇단음표는 다소 극단적인 당김음을 사용해서 연주한다. 즉, 균등하게 나누기는 커녕 균형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시하는 형태로 연주하게 되는데, 거기서 이론을 들고나와서 왜 그렇게 연주하냐, 균등하게 나누어 연주해야 한다고 나를 몰아갔던 걸 보면 다른 의도, 즉 후배들 앞에서 나를 dishonor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본인과 다른 색의 음악을 하는 내가 아마도 싫었을 것이다. 

 

 

#4.

그때도 지금도, 나는 정통파 스패니쉬 곡을 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일단 연습 어쩌고를 떠나서 재미가 없다. 내 귀에 듣기 즐거운 음악과, 내가 좋아하는 곡을 위주로 음악을 하는 것이 더 깊은 세계로 가는 첫 번째의 룰이다. 클래식 트레이닝은 그 다음이다. 재미가 없는데 무슨 얼어죽을 트레이닝인가. 내가 프로가 될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재능은 나를 이론에 묶어두지 않고, 느낌과 감각으로 음악을 하게 만들었다. 예술은 이론만으로 설명되는게 아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Por Una Cabeza만큼은 내가 수천번을 듣고 수백번을 피아노로도 기타로도 연주했던 곡을 드디어 무대에 올리는 입장이었기에 내 이해도를 넘어서는 사람이 당시에 동아리에 존재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에만 집착하는 자는 결코 내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나는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5.

몇 번 대화를 해보니 애당초에 대화가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고 여기선 내가 물러나야겠구나 생각하고 물러났다. 나는 나보다 학번이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선배대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이 그걸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기타부에 헌신한 것을 포함하여, 선배로서 그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 그리고 그의 노력을, 나는 충분히 존경한다. 물론 그것과 나의 철학/신념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당연하게도 그 코멘트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후에 후배들이 내게 와서 이 연주법에 대해 재차 물었을 때,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을 알려주고 내 식대로 지도를 했다. 이후에 아무리 셋잇단음표 천지가 되는 곡들이 나와도,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 이 논쟁이 다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왜였을까? 답은 너무나도 쉽다.

 

 

#6.

그의 황당한 코멘트를, 그럼에도 나는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내 음악해석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났던 건 분명 내 음악인생에 유의미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셋잇단음표의 해석에 대해서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기타리스트-프로를 포함해서-에게 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이론에 집착하는 자의 문제이다.

 

 

#7.

나는 극단적 실전주의자이자 경험론자이며, "절대로" 이론이 실전에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론에 집착하는 부류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론이 기본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쳐서 즐길 수 있는 마음이다. 음악의 본질은 즐거움과 행복에 있다. 실전을 바탕으로 얻어진 경험을 이론으로 찍어누르려는 것은 사실상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럼에도 저 코멘트를 기억했던 이유는 이게 나에게 득이 되도록 만들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후배들이야 결국 내가 맞다는걸 머지않아 다 알게 되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는 것 또한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내가 이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그냥 내가 잘 되면 되고, 발전하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겠다.

 

 

#8.

다시 나의 최애 기타리스트로 돌아와서,

그녀는 나에게 이런 답을 주었다.

"Well, ANY brazillian guitarist say just keep it easy, take it easy, lay back. It's not a metronomic deal. Go with the flow and be natural to this, like, how you want to play"

 

 

#9.

내가 믿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남의 말을 무시하는 편이다. 일단 처음 본 사람이거나 안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어차피 내 사람이 아닐테니 그런 깊은 언쟁을 벌일 일도 없고, 벌이게 된다면 빠르게 손절을 치는게 좋다. 그것은 무례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간 생각한 주제들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나는 나보다 20년 이상 더 산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나 이상의 통찰을 지닐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안지 제법 된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 본다. 다만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많이 아는 만큼, 그 사람의 어떤 말을 무시하고 어떤 말을 받아들일지는 판단하기가 쉽다. 

 

이것이 "나"를 찾아가는 방법의 한 가지이다.

남의 의견은 생각보다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이 나와 안지 오래된, 그리고 늘 내 곁을 지켰던 내 벗이 아니라면, 선배건 후배건 친구건 큰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설사 정말 가치있는 조언이나 사람을 놓친다 해도, 크게 상관없다 (물론 약간의 후회나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값진 나의 색을 가지고, 내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이 훨씬 더 멋진 일이다. 내 신념을 형성하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삶을 위해서라면, 그런 몇 개의 조언 정도야 놓쳐도 얼마든지 또 찾아내고 얻어내면 된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산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그대들 역시 알게 될 것이다.

 

기회가 지나간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라. 기회는 또 만들면 된다. 지나가는 것들에 연연하면 절대로 그대는 강해질 수 없다. 

 

 

#10.

그럼에도, 나와 다른 의견을 수용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머릿속 한구석에 방을 내어주고 그 생각이 살게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남의 말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주제에 '다른 의견' 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틀렸거나 맞았거나, 나의 생각이 진화하는 길을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일 내가 여전히 맞았다면 나의 삶에 확신을 한 조각 더하는 것이고, 내가 틀렸다면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는 것이니. 거기서 이미 상대가 맞다 틀리다는 의미가 없어진다. 

 

 

#11.

삶에는 여러 면이 있다. 그리고 당초에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선택하는 옵션을 정답으로 만들어가려는 의지와 노력이다.

내가 틀렸다면, 그 틀린 것 자체를 정론으로 바꿀 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선동가가 될 수 있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으나, 본인이 선동당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자신이 있으면 된다. 거기서 나아가 또 다른 선동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반대 입장에서. 그것이 정치가 탄생한 원리이며, 이 세상을 제도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다양한 이념의 정체이다.

세상은 행동하는 자에 의해 변하며, 행동만이 힘을 얻을 수 있다. 방구석에서 이론 타령하며 지식에 집착하는 자, 그리고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러 돌아다니는 자에게는 그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태초부터 약육강식이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가치 또한 수시로 변한다. 오늘 맞았던 것은 내일 틀릴 수 있고, 오늘의 무가치함이 언젠가는 가치있음으로 바뀔 수 있다. 인생은 시간을 걸고 하는 모험이다. 한 번 살 수 밖에 없다면, 이왕 사는거 멋지게, 그리고 가치있게, 내 주관을 세상에 떨치며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