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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편견의 황홀함

by BLUESSY 2023. 10. 3.

편견은 얼핏 들으면 마냥 부정적인 단어로만 들리고, 실례로 그리 사용된다. 다만 편견을 적절히 잘 활용하면 리스크 관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외를 좋아하는 요즘 세태들에겐 듣기 유쾌하지 않은 말이겠지만, 애당초에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절대 다수의 평범/일반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인간의 부류 또한 그러하기에, 우리는 예외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당연한 현명함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삶의 단계별로 여러 가지 편견에 마주하게 된다. 편견과 사실을 구분지을 능력이 없는 유아기부터, 에고가 형성되는 소년, 청년기를 거쳐 소위 말하는 30대가 되기까지. 그것이 나의 의지이든 무의식이든, 혹은 무의식보다 더 깊은 기저에 형성된 본능이든. 각자의 틀을 만들고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재가공해내면서 스스로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동일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상을 받아들이는 가치관과 철학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배경이 다르며, 조건이 다르며, 지능이 다르며,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의 평등함은 존재적 가치에 국한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결코 평등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려치기식 하향 평준화만이 답이기 때문인데, 이는 인적 자원의 낭비이자 전인류적 손해와 몰락으로 가는 직행루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여러 종류의 정보를 받아들여, 각자가 가지게 된 편견의 틀을 쌓는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물론, 그 편견이 허물어지고 수정되고 재가공되는 것 또한 편견의 construction의 일종이다. 말장난같겠지만, 편견 없는 자들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편견에 찌든 자들이다. '편견 있는 사람' 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그에 반하려 노력하는 편견을 가졌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 누구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때문에, 각자가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근원으로서의 편견은 필요악이라 하겠다. 상대를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인데, 아직 상처다운 상처를 깊이 가져보지 않았거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멘탈을 가진 경우라 하겠다. 예전에는 전자의 부류를 경멸했었으나, 내 곁에 둘 사람이라면 내가 지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오히려 상처가 없는 사람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후자라면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고.

 

편견은 부정적 단어이다. 편견과 싸우는 자들, 그리고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이들. 이해가 가지 않는 편은 아니나, 어차피 이 세상에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들 중 하나이다.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은 이상론과는 거리가 멀고 경험적 사고에 근거하기에, 그에 따라 '내 시각에서의' 인간은 편견을 지울 수 없다. 하여, 악한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를 이용하여 내가 삶을 사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이 나 나름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결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편, 편견은 또 다른 방향에서 나에게 황홀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내가 수 년간 쌓아온 짙은 색의 편견이 one single shot에 의해 산산히 부서져 내 주변에 흩날릴 때, 그 조각들이 각기 눈부신 내음으로 가득찰 때. 폐허가 되어버린 숲 속에서 그 숲 전체를 채우는 향기로움을 발견할 때. 내 세계가 부서지고 재구성되는 그 경험은 정말로 강렬하다 못해 황홀함의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30대 중반에 맞는 편견의 파괴는 즐거웠으며, 시렸다. 시리도록 아픈 황홀함의 경계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윽고 황금빛으로 가득찼던 하늘은 공동이 열리듯 내 머리 위부터 다시 파란색으로 물들어간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빛의 띠를 바라보면서, 다시 파란 하늘을 마주하면서. 내가 느꼈던 황홀함을 기억하고자 펜을 들었다. 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오며, 또한 기대하지 않은 일들을 만들어내고, 때론 유쾌하게, 때론 슬프게. 그리고 종국에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사라져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를 기억하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라져가는 황홀함의 끝자락을 잡아 내 마음 한켠에 뉘어 두고 싶은 까닭이다. 이렇듯이 편견과 황홀함의 두 가지 개념은, 내 인지 안에서는 같은 방에 기거하는 때가 있다. 충돌하는, 혹은 연관없는 두 가치가 같은 선상에 서 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신이 바라보는 세상에 조금 더 근접하려면, 우리는 개념, 인지, 현실의 바깥에서 생각하고 사고해야 한다. 

 

흐릿한 황홀함. Photo by KH Kim, Canon 6D + 24-105

 

"편견을 타고 온 나의 아름다운 황홀함이여,"

 

황금의 순간이 지나간 뒤, 그 자리에 남는 것이 허무함과 공허함임을 안다. 삶의 빛나는 순간은 찰나이고, 우리는 그 빛나는 순간을 기억하며 남은 공허함을 정돈한다. 다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정돈된 공허함이 언젠가 다시 채워질 날을 기다리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편견의 어두운 속성을 인지하고 있어야 밝은 속성을 끌어낼 수 있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이 공허함이 또 다른 가치와 연결되는 날을 기다리며 공허함도, 황홀함도 모두 마음 깊은 곳에 귀히 품고 살아간다.

 

"오래도록, 따스히 머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