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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좋은 인연, 좋은 사람

by BLUESSY 2023. 10. 17.

Mr. West's Egg Croissant (정작 이 날 만난 친구와 이걸 먹은 건 아님ㅎ). Photo by KH Kim, IPhone 11 Pro Max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 보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정착해서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때에,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지나가며 툭 던졌던 친구, 그를 통해 연이 깊어졌고,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었다고 하니까 뭔가 과거형같군. 아무튼 그런 사람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녀를 통해서 상당 부분 나의 새로운 결핍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덕에 지금의 내 모습이 있기까지 제법 많은 기여를 했다 하겠다. 여러모로 참 특이한 양반이기도 하고, 나름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 우리는 30대 초입에 들어서서 앞자리가 바뀐 것이 뭔 느낌인가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예전에는 둘 다 별 느낌 없다 (?) 는 결론을 냈었는데, 오늘의 우리는 다른 답을 낸다. 이젠 뭔가 달라지긴 했다.

 

이 사람과는 생각해보니 종종 점심이나 저녁을 먹긴 했어도 이상하게 약속이 빨리 끝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묘하게 분위기가 어긋났었고, 얘기하는 주제가 표면적인 경우가 많았었다. 엄청나게 빨리 가까워졌다가, 이상하게 멀어졌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 그냥 그런 간극이 자아내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학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오늘 픽업을 위해 차를 몰면서 했던 생각은 약간 달랐다. 내가 이 도시에 남아있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이제 그 누굴 만나 시간을 보내더라도 의미없이, 표면적으로 안부나 묻는 식의 만남을 가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여름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들었던 작고 묘한 그리움이 언젠가 사무치는 아쉬움이 되리라는 것을, 사실 나는 알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냈다. 조금 더 솔직한 얘기를 하고, 더 속내를 드러내보였다. 내가 그간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 관계의 다이나믹이 바뀌던 기점에서의 나의 마음과,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지녔던 생각들. 언젠가 이야기해주거나 언젠가 물어보려 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보았다.

 

그렇게 조금씩,

오늘의 우리는 이전에 보내던 시간들보다 좀 더 짙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적어도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이야기들을 꺼내고, 나의 속 이야기, 그녀의 속 이야기. 현재 살고 있는 삶에 대하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인간관계들과 주변의 친구들, 우리가 살아온 시간속에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시애틀에 오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사람이라서, 나의 시애틀 라이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리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가르침을 준 사람이기에. 나는 이 사람에게 깊은 존중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내가 성장하는데 정말로 큰 역할을 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전한다.

 

생각나는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당신도 내 모교 K대에 진학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현재를 살고 있을까. 우리는 분명 어떤 이유로든 서로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가까워졌을 것이고, 20대를 즐겁게 함께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린 비슷한 듯 또 달라서 재미있는 관계가 되었을 것 같다고. 내가 심리학 개론 계절학기를 듣던 2007년의 여름에, 그녀도 안암에서 한국사와 대학수학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여름 내내 안암에 살며 여기저기를 탐방한답시고 휘젓고 깝치고 다녔으니, 분명 한 번은 마주쳤으리라. 그런 우연의 실 같은 것들이 얽혀, 우리가 아마 이곳 시애틀에서 10년 뒤에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I-90가 아니라 좀 돌아가더라도 520을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15분 정도가 더 걸리는 길이지만, 시애틀로 돌아오는 길에 좋은 야경을 제공해준다 (+ 520은 무료다 ㅎ). 내게 시간이 한정되어있다고 말했던 것과 다소 상반되지만, 오랜만에 밀려들어온 이 느낌을 좀 더 오래 곱씹어보고 싶었다. 오늘의 만남은 따뜻했고, 좀 더 솔직했다. 우리는 몇 가지를 계획하고 약속했다. 아마도 조만간 첫 약속을 지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점은, 이제 정말 좋은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어떤 형태의 관계고 누가 되었든간에 말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눈에 들어온다면, 이 감정이 무엇인가 이런 걸 따질 시간에 그냥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최선을 다해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관계가 어떤 사랑이 될 지를 정해줄 뿐, 상대를  관계를 정의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늦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또 상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서로의 장/단점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따뜻한 바운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성으로 대하려다가 친구가 되더라도, 혹은 친구로 대하려다 이성이 되더라도. 그런 건 사실 정말로 긴 호흡의 인간사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다. 나의 삶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가를 생각하면, 성별과 관계를 막론하고 그들을 건져내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역경이 나누어질 대상은 당연히 반려자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좋은 친구, 좋은 사람, 좋은 벗, 그리고 좋은 관계.

 

나에게 오래간 좋은 사람이자, 시애틀의 안식처가 되어준 당신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