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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관계의 스텝이 꼬이면 - get all tangled up

by BLUESSY 2023. 10. 30.

My very first dancing shoes. Photo by KH Kim, IPhone 4

 

#0. < 12월 31일의 일기로부터.>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실수로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영화 <여인의 향기, Scent of a Woman>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흐린 날도 있고, 물에 흠뻑 젖어 최악인 날도 있다.

그리고 하루안에 그런 일들이 여러 번 뒤섞여 일어나기도 한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나빴다가 좋았다가.

 

 

#1.

나에겐 오래된 친구가 있다. 박사과정을 함께 시작했고, 온갖 고생을 함께 겪었으며, 서로를 보살피고 챙기는 데 정성을 쏟았던, 그리고 정말로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우리는 분명 많은 트러블을 겪었다. 때론 민감한 이해관계 (논문 저자.......) 일 때도 있었고, 또 한편으론 정말 사소한 걸로 열을 내며 몇 시간을 싸우곤 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도, 이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지만, 통화를 마칠 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린 이 6년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의 바닥을 보았고, (너무 많이 보긴 했다.....) 또 서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12월 31일의 일기는 우리가 오피스에 쳐박혀서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연구얘기나 하고 있다가 열받아서 골든크릭...맞나? 아무튼 여기서 한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설산 하이킹을 갔던 날이다. 그리고 그 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우리의 은밀하고 괴상한 음악 취향... 이를테면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 플레이리스트를 서로에게 들키게 된다. 

그 날, 우리는 밤새 와인 한 병과 함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서로가 체면 차리느라 넘지 못하던 선을 아득히 넘어, 그간 그 선 때문에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새벽까지 쏟아내다가 잠이 들었다.

그 밤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더 알고 싶었고, 더 알려주고 싶었던, 해가 뜨는 것이 야속했던 그 새벽. 졸려오는 눈꺼풀이 답답했던 날.

이 music night은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결과물이 참담해지곤 했다. 절반은 와인 때문, 또 절반은 연구 스트레스 때문.

#2.

관계는 원래부터 오르막 내리막이 있다. 특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되는 것 들이 있는데, 순항이냐 난항이냐가 이 상황에서 대체로 결정된다. 그리고 대부분 감정의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배는, 원래 난항을 맞이하는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두 사람의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면에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엮여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파고를,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잃을 수도, 얻을 수도,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죽 갈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 상대를 바라보지만, 그것이 나와 다른 결의 파도일 때에는 어쩔 수가 없음 또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3.

<여인의 향기>를 정말 좋아한다. 내가 탱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트루라이즈>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멋없는 탱고지만, 정말로 배우게 된 이유는 이 영화 때문이다. 알파치노의 멋드러진 탱고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이 영화에서 길게 남았던 건- 참고로 이 영화를 봤던 그 당시의 나는 영어를 아주 못했다-

"스텝이 꼬이면 그것이 바로 탱고라오"

라는 자막만 보았다.

 

본래 고등학교 축제에 올릴 공연을 준비하면서, 딱 탱고씬만 잘라서 봤었다. 영화 전체를 보게 된 건 조금 더 후였다.

17살의 나는, 그 대사의 너머에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을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데, 정말이지 그 감각은 소름끼친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

이 대사를 포스트잇에 써서 지갑에 넣고 다니며 한참을 매일매일 꺼내보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서, 내가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

다시 관계로,

우린 모든 관계에 '소중한'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는다. 모든 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 없고, 모두와 행복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연스레 관계의 경중을 따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소중함은 상처와 함께 오고, 또 한편 다른 길로는 따스함을 몰고온다. 그러나 이는 생각보다 많이 복잡해서, 그 관계가 equilibrium에 도달하기까지는 대체로 여러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합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처음부터 compatible 한 사람을 찾으려 했다면, 물론 그런 사람이 분명 존재하긴 한다마는- 이야기를 통해, 행동을 통해, 그리고 약간의 다툼을 통해서, 처음에는 incompatible 한듯 보이는 이도 나와 그 과정을 함께 겪으며 방향성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이 더 가치있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렇게 쌓아올려진 관계가, 연인이든 친구든 훨씬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저리도록 깨달았다.

 

 

#5.

꽤 오랫동안,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대를 거두는 것이다." 라 생각하며 살았다. 약간의 허무주의적인 태도와 함께, 그럼에도 효율적인 관계의 줄다리기를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노력을 했다. 

사람은 내가 아끼는 사람,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모르게 일정 부분 기대를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러하고, 그래서 자잘하게 쌓인 많은 상처들이 언젠가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기대를 안 하려 해도, 좋은 사람에게는 기대를 하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기대를 버려야 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이젠 잘 모르겠다. 기대를 하는데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상하다. 자연스럽게 기대가 안 되면 그것이 가장 좋은 상태겠지만, 그것은 사실상 상대에 대한 포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관계가 진전되긴 어렵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다. 지금 나는 굉장히 나답지 않다. 그래, 그런 상황이었다. 고민을 짧게, 다만 깊게 하고. 행동으로 빠르게 옮기는 사람이었던 내가, 쓸데없이 긴 고민을 하고 있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고, 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스탠스이다. 여기선 잠시 숨을 고르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겠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 만나는 사람들이, 인연들이, 그리고 그들 중에 나와 별 탈 없이 잘 이어져나가는 연들이 내 진짜 사람들이다. 내가 몽키 펀치의 '그'를 롤모델로 삼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대로 돌아갔다.

생각은 짧게, 그러나 인텐스하게.

행동은 빠르게. 

 

 

#6.

어차피 내가 나다울 수 없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다투고 조율을 하더라도, 언젠가 잃게 된다. 최선을 다해 다가가 마음을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그 마음이 닿지 않는다면, 거절당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의 자유이므로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저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연인 것. 내 방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서로 충실히 살아가며, 가끔 생각날 때 마다 서로를 축복해주는 정도로만 남으면 그것으로 절반의 성공이다. 나머지 절반은 만일 세상과 시간이 돌고 돌아, 이 세상 어디에선가 혹여나 만나게 된다면. 그 때 다시 한 번 전할 마음을 위하여 남겨두는 것.

 

간만에 머리가 맑다.

이제 이야기가 단순해지고 쉬워졌으니, 할 일은 더더욱이 명백하다.

 

 

#7.

다시 여인의 향기.

탱고에는 실수가 없다 (There is no mistake in Tango)

 

그러니, 춤을 출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

꼬인 스텝도, 엉켜버린 무브도.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텐션이나 커넥션도.

언젠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 않더라도, 각자의 나름의 완성을 위해 꾸준히 조금씩 시간을 타고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