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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오박사에 대하여: 서로를 기억할 때

by BLUESSY 2023. 10. 10.

오박사는 나와 함께 석사를 같은 랩에서 시작했던 나의 절친한 벗 중 하나이다. 아침 9시 반 출근 밤 11시 이후 퇴근이 규칙으로 정해져있던, 괴로웠던 랩 생활을 함께 이겨낸 전우이기도 한데, 우리는 퇴근을 하면 종종 같이 산책을 했었다. 때론 아무 말 없이 카이스트 교정을 한바퀴 돌거나, 아니면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둘 다 책을 좋아했기에 책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던 기억이 있다. 나보다 세 살 가량 어린 친구였음에도 참으로 배울 것이 많았다. 우린 당시로서는 어린 나이였고, 살아온 날들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수 많은 것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나는 그가 나의 생일에 선물해준 이석원 작가의 '보통의 존재' 라는, 노란 색 표지의 책을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작년에 한국에 갔다가 깜빡하고 내 방에 두고 왔지만... 어쨌건,

 

작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새벽 1시에 결국 오박사 집에 찾아갔다. 서울 온 지역을 차로 돌아다니던 때,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너무 오래 못 보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연락한지가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던 나의 벗. 웃으며 나를 맞아준 그는 여전히 온기와 위트를 간직한 채,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여전히 제자리인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는 잠시간의 반가움을 나눈 뒤, 화곡동의 아프리카 라는 카페로 이동해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카페 아프리카의 소품, Photo by KH Kim, IPhone 11 Pro Max

 

뜬금없이, 이번 생일에는 자기가 먼저 기프티콘을 보냈다고 한다. 무슨 소린지 감도 잘 안 왔었는데, 그가 말하길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은 내 생일을 타국에서도 잘 챙겨줬는데, 내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에게 뭔가를 보낸 적이 없더라. 그래서 이번의 당신 생일은 알림까지 맞춰두고 선물을 보냈다' 라고.

타국에 나간 친구의 카톡 채팅방을 열어보고 그걸 올려서 살펴봤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내 채팅을 열어봤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사실 상대가 무례하지만 않는다면, 받기만 하는 것 자체를 그다지 신경쓰는 편은 아니다. 내 마음의 크기만큼 주는 편인지라, 그냥 감사하다는 말 하나면 족하다. 그는 그런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듯 나와 같은 결의 마음,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큰 크기의 다정함을 지닌 실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간 멀리 떨어져 있던 그 시간과 공간을 메꾸려는 듯, 우리는 서로의 삶과 가치관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박사는 '당신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요. 그렇지만 그게 당신 장점입니다' 라며 웃었다. 너무나도 그다운 평가라 나도 오랜만에 행복하게 마음놓고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면 내 생각에도 나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거든.

 

동시에, 저 한 마디가 정말 큰 위로와 위안이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국을 방문한 게 거의 4년만인데, 어쩔 수 없이 타국에 나와 있다보면 정신적 소모를 겪게 된다. 그게 아무리 좋은 사람들, 좋은 친구들로 둘러쌓인 환경일지라도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나의 터전에서, 내 삶의 일부였던 사람들과의 접촉이 강제로 끊어지는 것은 확실히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이었음을. 한동안 이를 티내지 않고 지워내려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젠 인정할 수 있다. 약점을 말할 수 있을 때, 아픔을 말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그것은 내 안에서 약점도 아픔도 아닌 존재가 되어 사라져간다. 그런 의미에서, 오박사의 미묘한 위로는 내 마음에 크게 와닿았고, 그 날 나는 정말 몇 년 만에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던 그 당시의 모습으로 있어줬던 그가 못내 고마웠다. 한편으론,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 그가 자랑스러웠고, 그가 지녔던 단점들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길을 찾아 헤메는 동안, 그는 착실히 한 걸음씩, 앞이 보이지 않아도 꾸준히 나아갔던 것이다. 나는 그의 끈기와 집념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괴로웠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더 현명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나누며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것이 아름답고 찬란한 날들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고 힘들었던 날, 서로 의지하며 쪽문 뒤 포차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대학원생 신세를 한탄하던 그 때가 오히려 더 내 마음에 따스히 남는다. 그렇게, 해가 아직은 다행히 밝아오지 않았을 때 즈음, 우리는 짧은 포옹과 함께, 서로에게 감사를 전하며 헤어졌다.

 

내가 연구소에서 박사유학을 준비하고, 그는 박사과정을 마무리짓던 그 시기에, 우리는 못해도 매주 한 번 씩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석사시절에 했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기업에 들어갔고 나는 미국으로 나왔다. 그 4년의 시간동안, 돌이켜보면 우리는 서로를 거울삼아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세공하며 성장했다.

 

내년 초에 그간 그가 이어온 인연의 결실을 맺어,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서로의 연애사를 대강.......대강이라고 하자. 아무튼 알고 있는 나로선 그가 확실한 성장을 했음에 기뻤다.

 

그의 결혼을 축복하며, 언젠가 그가 이 글을 발견할 날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Tribute to Dr. SJ Oh, my dear friend and beloved labmates, who struggled, enjoyed, and grew up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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