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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사랑에 대하여 #3 - 노력의 기적

by BLUESSY 2023. 10. 24.

 

Some beauty needs needling moment. Photo by KH Kim, Canon 6D + 24-105mm STM

#1.

친구가 8년 다닌 직장에서 이직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내 대학 생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친구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간 멀어졌다가, 내가 한창 빠져있던 취미에 같이 발을 붙이고 나선 급격히 다시 가까워졌던 친구. 나와 기타부 생활을 같이 했던 대학 동기이다. 그리고 이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

예전 일기장들을 읽어보다가 흥미로운 소재가 떠올랐다.

벌써 10년도 더 된, 전역 후 복학해서 대학교 다니다가 만났던 나의 예전 연인 A가 했던 이야기.

 

"사랑의 가장 위대한 점은 변한다는 거야."

 

나보다 5살이나 어린 사람이었는데, 그 나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특히 20대 초중반의 5년은 엄청난 차이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으리라. 같은 집단에 속해있다가 만나게 되었는데, 여전히 미성숙하고 거칠었던 그 시기의 나를 많이....음. 교화? 시켜준 여자이다.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특질이었다. 

결과적으론 롱텀에서 봤을 때 가야하는 길이 너무 다르기도 하고, 서로 꿈꾸는 패스가 전혀 맞지 않았기에 반년여의 연애 후 헤어지긴 했지만, 그 반년동안 깨달은 게 너무 많았다. 나도 이 사람처럼,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내 삶에서 최초로 그렇게 다짐하도록 만들었던 좋은 사람이었다.

 

 

#3.

사랑을 대하는 10대, 20대, 그리고 30대의 나는, 그 자세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미디어에서는 늘 '변치 않는 사랑' 에 대한 환상을 심어대기에 여념이 없던 때, (물론 나는 인간에게 있어 불변의 사랑 같은 건 애당초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나에게 '변하는 사랑'의 의미를 알려줬던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A를 만나던 시기에는 내가 과거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때라서 관계의 줄타기가 정말 힘들긴 했다. 나 자신의 삶과 연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선을 그어놔야 하는지, 어떻게 분리하고 어떻게 합쳐야 되는지가 여전히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아직 졸업을 앞두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 외에도 내가 계속 해왔던 여러 활동들을 지속해야 하니 이래저래 연인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A는 그런 나를 두고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것은 온전히 나의 잘못이라는 걸 이후에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 데이트가 끝나고 헤어지는길에 조용히 내 품에 안겨,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 나는 오빠가 뭘 하고 있는지 늘 궁금해. 그렇지만 참고 있는 거야."

 

이 날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눈이 오는 날 밤이었고, 목동 근교 어딘가의 육교 아래였을 버스정류장에서 나눴던 이야기이다. 내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버스를 함께 타고 내렸던 때.

 

"오빠가 꾸는 꿈이 뭔지 잘 아니까. 오빠도 내게 신경 많이 써 주는 걸 잘 아니까. 그래서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헤어지기가 조금 힘드네."

 

그렇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A는 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과연 나는 내 연인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추운 것도 잊고,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조금씩 훌쩍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 왜 이걸 모르고 있었나. 왜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나.

 

그렇게 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몇 대가 지나갔다.

이내 들썩이던 어깨가 잦아들고, A가 고개를 들어 나를 다시 올려다봤다. 내 코트자락을 꽉 움켜쥐며, 나직히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 오늘만. 응?"

 

우리는 그 날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밤새, 서로를 껴안고 눈을 맞추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동이 틀 때 까지 이야길 나누다 잠들었다.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남는 밤이다.

 

 

#4.

그녀가 정말로 조용히, 그러나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한 대 후두려 팬 느낌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도 노력하기 시작했다. 온 신경이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내가 노력한다는 걸 깨닫게 될까에 집중됐었고, 그 첫 번째로 바꾼 것이 연락이었다. 불안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라는 그 사람의 마음이, 사실은 불안감과 뒤섞인 기다림, 그리고 서글픔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혼자 기다리는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 일이 있고 집중해야 될 때는 물론 빼놓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하게 될 것인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감정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성적인 인간 = 극 T형 인간이라 그 때 까지 (대학생 때는 ENTJ였다) 내 사람의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 어려웠다. Yes/No로만 세상을 바라보던 내게 이 사람은 관찰의 중요성을 알려줬고, 아마도 내 지능이 높은 탓이겠지만 (ㅎ) 그것을 체화하고 적용하기 시작하니 많은 줄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알게 된 것이, 연애를 할 때 마냥 편한게 좋은건 아니구나. 노력을 해서 나와 상대가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 때론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것도 있겠지만, 그 또한 우리 관계가 만들어지는 한 부분이다 라고 생각을 하면 이해가 된다. 

 

10대의 나는 사랑이 끌림이라고 생각했고,

20대의 나는 사랑이 노력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5.

30대는 조금 다르다.

30 초의 나는, 사랑은 단순함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좋은 사랑' 은 단순해야 한다고.

32~3살의 나는, 사랑은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난 지금, 나는 사랑이 다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6.

정확히는 지금까지 내가 정리했던 사랑의 정의가 모두 포함된 채, 그 위에 노력이 다시 올라선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헌데 이 노력이 조금 다르다. 상대를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내가 상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노력하는지를 알게 되면 상대를 향하는 나의 사랑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크기를 알 수 있다. 

 

더불어,

노력은 수천 수만가지가 있다. 그래서 어떤 노력이라고 콕 찝어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노력이 깃든 관계의 말은 티가 난다.

 

 

#7.

최근에 누군가 내게 그랬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맥락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의 불가' 또한 하나의 답이다. 헌데 한 가지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방향성이 있는 것이고. 그 방향성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지를 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사랑의 핵심으로, 나는 노력을 택했다.

 

노력을 통해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의 시작은 노력보단 더 다양하고 많은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되고 나면, 그것을 건강하고 예쁘게 유지하기 위한 의미의 노력이다. 

 

이 노력에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나 혼자 하는 노력은 크게 의미가 있진 않다. 서로가 원하는 방향성을 맞추어 가면서, 아주 작은 영점을 계속 조정해가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불편한 이야기도 서스럼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력을 촉발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자 동기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가 아니라, 우리 함께 이렇게 하자 가 되어야 하는 것.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다른 인격체와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8.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정의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할 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더 나은 생각에 도달한다.

 

그래서 더 A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것 아닐까.

사랑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정의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흔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언어로, 그리고 다양한 표현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변화들을 시간 속에 흘러가게 두지 않겠다. 순간을 잡아채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빚어내는 것이 내 사랑에 대한 표현이고, 의지이다. 40대의 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노력 위에 무엇을 얹을 수 있을까.

 

 

나에게 처음으로 노력을 가르쳐준 A, 그리고 오랜만에 사랑의 정의를 리마인드하게 해준 무지개 씨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