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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사람에 대하여 - 사랑에 대하여 #2

by BLUESSY 2023. 10. 8.

유난히 눈에 띄는 것들. Photo by KH Kim, Canon 450D

#1.

아침 일찍, 친구가 법정스님의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라는 글을 보내줬다.

오래전 읽었던 글귀인데도 늘 읽을 때 마다 새롭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봤다. 도대체 진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무엇 때문에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이 인연을 구분하는 방법을 오래간 생각했던 것 같은데, 결국 아직도 온전한 기준을 세우지는 못했다. 언젠가 고객 중 한 명이 한밤중에 내게 전화해 뜬금없이 연애이야기를 했었다. 유난히 내가 아끼던 고객이라 졸려 죽겠지만 딱 한 번만 짜증내고 들어줬다. 삶이 변화하는 시기에 끼인 연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였다. 생각보다 길게 통화를 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도달했던 결론은 악한 의도나 머리를 쓰지 말고, 선한 의도를 지닌 채로, 상대에 대한 사랑을 유지한 채로, 무리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놔 두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래도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으나, 삶이 변화하는 시기에 인연에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노력하는 사람이 더 다치게 되어 있다. 노력한다는 것은 그 만큼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고, 내 마음이 상대보다 큰 경우가 많기에, 그 과정에서 서운함, 아쉬움, 슬픔, 상처 등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나의 마음 기저에 큰 데미지를 주게 된다. 삶의 변화는 변화대로 놓치고, 상대는 상대대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올바르게 서야 상대를 지킬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마음에 파도가 일 때, 그 파도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나의 파도와 상대의 파도를 둘 다. 그 물 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기로 치는지. 언제 파도가 일어나는지.

한 발짝 물러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2.

헌데 그것이 허무주의나 회의적 입장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내 사람을 지키는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렇다. 대화를 해야 한다.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나 문제는 어려울지언정 해결이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억지로 무언가를 틀려고 하지 말라는 뜻에서의 '흘러감' 이다.

 

그가 그 데미지를 기꺼이 감내하고, 상처입더라도 두 가지를 다 잡겠다는 사람이었다면- 내게 그 새벽에 전화하진 않았겠지. 처음부터 단정짓고 답을 주지는 않으려 노력했지만, 장장 두 시간 가량의 통화 속에서 나는 그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전화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가 듣고 싶어하던 답을 주었다.

 

 

#3.

연이 닿으려면 일단 상대와 나 모두가 좋은 사람이거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최소한 노력이라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세상에는 업의 굴레라는 게 있어서, 악인에게 좋은 인연이 닿기는 어렵다. 의인의 탈을 쓴 악인을 걸러내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의인이 되어야 한다. 

 

 

#4.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가장 큰 힘은 사랑이다.

올 초에 약간의 심경 변화가 있었다. 좀 더 연을 잘 관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보다는 좀 더 순수하게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 내 주변에 나타나는 인연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칫 감정의 줄다리기로 발전할 수 있기에 최대한 뒤로 물러서는 방식을 택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정말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더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은 내 연이고, 내 사랑이 가치없어진다 느껴져 내려놓고 싶어지는 사람은 내 연이 아닌 것.

 

 

#5.

운명을 믿었던 적이 있다.

본래 그렇지 않았음에도, 운명을 열렬히 믿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믿지 않는 나조차도 신기하다 느낄 만큼 마법같이, 기적같이 나타났던, 모든 것이 다 완벽하다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그 때, 사소한 것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크게 실망했고, 결국 그 갈등을 풀지 못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달콤함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기대치를 나도 모르게 높여버리는 반작용도 있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이성, 동성, 연인 할 것 없이. 삶에 사람이, 사랑이 충만한 때에는 연에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외로워질 때, 우리는 누군가를 포기하고 떠나보낸다. 헌데 이것조차 운명이라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내 사람을 지켜내고, 또 누군가는 충만한 가운데서도 헌신짝처럼, 누군가를 내다 버린다. 그렇기에 인연과 운명을 대할 때만큼은 우리는 예외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젠 운명을 믿지 않는다. 상황과 진심을 믿을 뿐이다.

그럼에도 운명같은 인연이라는 건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이 다가오면, 이제는 이전처럼 불나방처럼 뛰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상대와 나 모두를 태워 없애버릴 뿐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고. 서로가 좋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충분히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도록 기다린다. 그 과정에서 다툼,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스며듦의 한 부분이다. 함께 최선을 다하는 연이라면, 먼 길을 돌고 돌아도 결국 만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위로할 수 있고, 아픔을 나누고, 힘들어하는 상대를, 상처받은 상대를 내가 한 걸음 더 거들어 주는 측은지심. 그것이 아깝지 않고, 함께 괴로워하는 날들조차 자연스럽게 서로를 위로하게 되는 마음들.

 

상처를 끌어안아 닫아줄 수 있는 마음에 대해.

 

그럼 그 때에야, 운명을 믿지 않는 내게 비로소 운명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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