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쿼터에 접어들었다. 지도교수와 좋은 딜을 치고, 대신 마지막 학기에 펀딩문제로 인해 수업조교를 하게 되었다. 도대체 몇 과목을 조교를 한건지.... 덕분에 영어로 강의하고 애들 다루는 데는 좋은 연습이 많이 됐다.
어쨌건, 내가 전담으로 맡아서 해왔던 공학개론 (정확히는 Engineering Transformation of Health Problem) 수업이 있었는데, 내 첫 전담 강의를 들었던 애들이 오늘 이 수업에 들어와있는거다. 되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공학개론은 대부분 아직 전공이 정해지지 않은 1학년들 중에 공학계열을 전공하고 싶은 학생들이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인데, 당시 내 강의를 좋아했던 친구들이 제법 많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학과를 선택했고, 어쨌거나 강의 끝나고 신선하고 재밌는 강의였다는 평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당시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조교로 다시 만나고, 그리고 이번 쿼터가 마지막인데. 오늘이 course intro 시간이어서 교수가 나를 소개했고, 나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는 말로 소개를 시작했다. 특이했던 점은, 내가 당시 특별히 신경썼고 많이 챙겨줬던 조나단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스위스에서 온 친구로 아버지가 박사, 어머니가 석사를 하고 둘다 연구직에 계신다고 했었다. 해서 자신도 박사를 하고 싶은데 조언을 구하고 싶다면서, 해당 쿼터 내내 수업 끝나고 나랑 얘기를 제법 많이 나눴었다. 헌데, 정작 얘는 나를 본체만체 하고. 내가 정말 지나가듯이 상담해줬던 몇몇 학생들이 오히려 나를 더 반기고 좋아하는 눈치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지금껏 나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어왔던 학생들은 대부분 나의 호의에 정비례하여 나와의 관계를 쌓아갔었는데, 이렇게 반비례 형태로 나타난 건 이 클래스가 처음이었다.
'호의가 길을 잃는다'
작년 말 즈음에, 누군가를 잃고. 오랜만에 제법 아파서 내 노트에 적었던 문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2.
사람의 '케미' 라는 게 정말 너무나도 중요하다. 고유의 주파수라는게 있어서,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현대 MBTI 열광을 만들어낸 이유의 한 부분이겠지만, 어쨌거나 상극인 사람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범주의 common sense라는게 있다. 이 상식의 경우는 결정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각자 느끼는 예의와 가장 깊은 관련이 있어, 상대방과 어느 정도의 선을 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언젠가 무지개 씨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문제가 있다면 꼭 얘기해달라' 고. 그리고 그 때 직감했다. 이 아이와 오랜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겠구나. 좋은 여잔데, 아쉽다고.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하는 여자를 잘 믿지 않는다. 분석심리학적으로도 그렇고, 이 말의 이면에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지적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뭐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단 한가지 후회하는 점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정말로 만에 하나 있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어봤다는 것이다. 역시나 인간은 다르지 않다. 특별한 인간이라는 게 없다는 걸 오랜만에 다시 한 번 깨달았던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다소 서글펐던 것은, 나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이런 형태로 어긋나지 않았을 텐데 라는 것이었다.
#3.
호의는 1:1이 아니다. 역지사지라는게 분명히 중요한 사자성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관계에서 역지사지의 반대를 생각해봐야 할 때도 있다. 왜냐, 인간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걸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B라는 건 절대 참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방은 A라는 걸 절대 못 참고, B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역지사지와 공정 어쩌고 이런 병신같은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면 나와 상대방 모두가 A와 B를 둘다 참아내거나, 혹은 A, B 모두 안 참아야 한다. 근데 이렇게 접근하면 애당초에 인간관계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가 없다.
이 경우에 상대방은 나에게 B를 절대로 하면 안 되고, A는 하든말든 상관이 없다. 반대로 나는 상대방에게 '나에게 A가 별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A를 하면 안 되고, B는 신경을 안 쓰면 된다. 즉, '상대가 싫어하는 것' 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안 해야 하는 것이다. 헌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상대가 '가만히 있는 것' 을 내가 못 견딘다면, 상대방은 나에게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이 '안 하는 것' 이 가장 좋은 솔루션이 된다. 상대의 기본 디폴트로 돌아가라는 요구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라' 라는,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 보다 훨씬 더 쉽고 마일드한 것이다. 인간관계는 쉽고 편해야 한다. 너무 많이 노력하고 치열해야 하는 관계는 뿌리부터 틀린 관계다.
#4.
'무언가를 안 하는 것' 과 '무언가를 하는 것' 사이에는, 개인의 기호와 상관없이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무언가를 안 하는 게 디폴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뭘 안 하는 걸 상대방이 못 참아 한다면, 그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 바꾸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 연인 관계를 예로 들면 연락 문제가 되겠지. '연락을 잘 안 하는 것이 싫으니 연락을 자주 해줘' 가 아주 좋은 예시다. 아예 연락을 안 하는 게 아니라는 전제 하에, 연락을 자주 안 하는 게 디폴트인 거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기 때문에, 그걸 연애로 덮어버리면 필시 삶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무엇을 우선시하는 삶을 사느냐' 의 다소 어리석은 소리로 커버되는 게 아니라, 본래 자신이 바로 서고, 자신의 삶에 집중해 있어야 건강한 연애가 가능한 것이다. 플러스, 거기에 스스로의 위치와 나이 등의 메타인지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 20대나 할 법한 연애와 행동을 30대가 하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일과 가정 중 '행복한 가정이 우선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에 집중하는 남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가정은 결혼한 경우고, 연애에서는 행복한 관계, 어쨌거나 같은 말이다) 이건 남자를 애당초에 너무나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연애를 많이 안 해봤거나, 해도 헛짓을 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5.
뭐쨌거나, 이런 차이들 때문에. 호의가 길을 잃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호의가 아닌, 스스로에게 취해 있는 호의를 베풀어놓고 그것을 호의라 칭하면 안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건, 그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들이는 것이다. 내가 정해둔 선을 넘었을 때, 경고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그 이후에는 그 사람을 보내주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내 호의와 에너지, 리소스는 분명히 제한되어 있고, 이것을 제대로 주파수가 맞아서 서로 감사하고 인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낭비되는 에너지와 길을 잃은 호의는 결국에는 나 자신의 정신마저도 좀먹을 수 있는지라,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스스로의 정신력을 잘 보존해내야 한다.
나는 그런 성인군자가 될 생각도, 좋은 사람이라 불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지켜낼 힘을 잘 기르고, 잘 운용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보내주어야, 새로운 인연이 온다. 잘 보내주어야, 갔던 사람도 오히려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6.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다. 떠나보낸 인연들, 그리고 그들 중 돌아온 사람들과의 관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망망한 흐림. 열망과 실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났을 땐 어렵지 않게 보냈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언젠가. 그들이 내 뜻을 이해하고, 조금 더 성숙해졌을 때 내게 돌아온다면. 그 땐 적어도 웃으며 맞아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던 말던, 나는 여전히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렇기에 가끔 이런 글을 써제기면서 내 삶의 모난 부분들을 되돌아보는 것. 더 날카롭게 갈아내야 할 때는 정성을 들여 뾰족해지고, 문득 둥글어져야 하는 부분들이 보이면 그 또한 부딪히며 마모되어감을 즐긴다.
선의를 만나면 더 큰 선의로 보답하라.
나에게 관심없는 자를 만나면 각자의 갈 길을 가라.
그리고, 명백한 악의를 만나면
다시는 감히 내게 악의를 보이지 못할 정도로 상대를 철저히, 그러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짓밟으라.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던졌던 출사표의 원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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